보는 세계, 그 너머를 찾아서 – 김복영

2023-01-07

보는 세계, 그 너머를 찾아서

: 권현진 근작 《Visual Poetry》 전

미술평론가 김복영 | 전 홍익대 교수⋅철학박사⋅미학예술학

컬러리스트 권현진은 2016년(박사학위전) 이후 지금까지 「불가시의 가시화」를 주제로 색채의 ‘하이크로마’(high chroma)와 ‘스푸마’(spuma)를 빌려 전적으로 색채로서만 가능한 원초의 세계를 다루어왔다. 그간 작가가 보여준 건 색채를 넘어 빛의 실체에 접근하려는 데 있었다. 작가가 찾는 세계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형상의 세계가 아니라 색의 광휘와 연무(煙霧, mist)가 만들어내는 신비한 가상의 세계였다. 이 세계는 요컨대 탈근대 이후 세계의 작가들이 주목해온 ‘가상’(simulacres)의 세계를 색에 의한 탈형상으로 격상시키려는 데 궁극적 과제가 있었다.

작가는 이 세계를 우리가 결코 볼 수 없기에 비가시의 세계를 가시화하는 방법이자 수단이라 자임했다. 이를테면 일상의 세계를 서술하는 산문(散文)이 아니라 운문(韻文)으로 압축한 시(poetry)를 회화로 치환하는 지름길이라 확신했다.

작가가 이번에 내놓는 《Visual Poetry》는 그간의 탐구 결과를 고도로 숙성시킨 최근 버전이다. 종래의 그것이 작고 섬세한 수소의 물방울이 윤무(輪舞)하는 세계를 형상화했다면, 근작들은 강열한 색조들을 정방형 입체의 ‘하드에지’(hard edge) 표면을 채우거나 이를 균질한 크기의 사각형의 셀로 축소시켜 미소 사각들의 하드에지를 도열하거나 이를 미디어에 의해 유동하는 사각들의 조합구조를 시도한다. 작가는 근작들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나의 근작들은 단순한 구조가 계속해서 번복되는 순환성에 의해 움직이는 듯한 시각적 환영이 자아내는 착시효과를 빌림으로써 관객들이 꿈을 꾸거나 한편의 서정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갖도록 하였다.

가변적 추상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평면회화와 함께 3차원 정육면체의 표면과 미디어작업을 병행함으로써 이미지의 경계를 확장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해서 보는 사람들이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이 아닌, 아직 보지 못 한 것까지  도 볼 것으로 기대한다(「작업노트, 2021」에서 번안).

이 언급에 의하면 근작들은 우리가 육안으로서 보다는 마음의 눈으로 즐기면서 볼 수 있는 시각의 환영을 창출하려는 데 뜻이 있다. 메를로-퐁티는 일찍이 이를 두고 이렇게 예견한 적이 있다. ‘회화의 깊이란 외적인 것에 대한 조망이거나 단순히 그것들과의 물리광학적 관계는 결코 아니다. 화가의 세계란 세계가 화가 쪽으로 겨냥하는 데서 화가로 하여금 세계를 그처럼 보도록 함으로써 화가를 탄생시킨다’(L’oeil et l’esprit, 1961, 69쪽). 그에 의하면 마음 안에서 작동하는 화가의 세계는 우리의 외부에 실재하는 세계와 달리 우리의 정신 안에서 구현되는 ‘자립적 형상의 스펙타클’(autofigurative spectacle)이다. 이 또한 권현진의 작품에도 잘 들어맞는다. 그녀의 마음에서 작동하는 고채도의 스펙타클이야말로 자립적인 환영임에 틀림없다.

필자는 이에 더하여 권현진이 창출하는 근작의 환영이란 지상의 그것을 넘어 천상의 그것을 불러오는 최상급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가 그리는 세계는 우리로 하여금 초월의 세계를 보게 하는 ‘팬태스마’(phantasma)의 그것이라 해서 족할 것이다. 그녀의 세계는 그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미지의 것을 보게 할 뿐만 아니라 듣게 하는 ‘팬텀뮤직’의 요동치는 운율을 느끼게 한다.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잠깐의 환영을 선사한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일찍이 이를 일러 환영을 보게 한다는 뜻으로 ‘판타제인’(phantazein, to make phantom visible)을 연극을 비롯한 시의 본질이자 최상급으로 여겼다. 아니 ‘그처럼 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necessarily to make it visible)는 데서 예술의 기원을 찾았다. 이 점에서 권현진의 근작들은 보는 사람들을 열정적으로 위무(慰撫)하고 또 배려한다. 이는 굳이 그러한 선례를 우리 미술에서 찾자면 1960년대 청전(靑田)의 남화풍에서 형이상학적 비경을 보거나 1970년대 수화(樹話)의 조밀한 픽셀의 유동하는 하늘에서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설화를 들을 것만 같은 착각을 권현진의 작품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선례는 색의 화려함 대신 무채색과 형상의 잔잔한 유동을 빌렸기에 권현진의 선례라 하기에는 궤가 다르다 하리라.

이러한 지적은 권현진의 근작들이 보여주는 것에 관한 한 너무 정태적이고 수동적인 면면이라면, 그녀의 세계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해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아서 단토(Athur Danto)가 전세기말 30년사(1970~1990s)의 격변기를 살았던 헤겔⋅비데마이어 같은 전위작가들의 세계를 가리켜 말한 다음의 언급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의도는 세계를 변혁하려는 데 있었다. 마치 기지의 세계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세계란 미적인 간주곡(aesthetic interlude)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위한 하나의 도덕적 모험(a moral adventure)의 산물이었다. 그러한 한, 그들은 미술의 역사상 충격적인 시대를 살았다. 그건 제도권의 관심에 대한 저항이자 보는 것의 역사에 대한 예견치 않았던 저항이었다(Linda Weintraub, Art on the Edge and Over.Art Insights, Inc. 1996, 12~16쪽. Arthur Danto, Hegel⋅Biedemeier⋅The Intractably Avant-garde).

단토의 이러한 격한 언사는 그가 이보다 앞서 르네상스 이래 서구미술의 종언을 예견했던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그는 헤겔⋅비데마이어 여타 다루기 껄끄러웠던 당시의 전위작가들의 작품에서 미래 예술의 새 가능성을 보았다. ‘미술의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예술의 부활’을 보았던 것이다. 그가 보았던 세계는 기지의 세계를 연장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도래할 미래예술을 위한 도덕적 모험이었다. 이야말로 보는 것의 역사를 새로 시작하기 위해 기존의 미적 제도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 또한 권현진의 《Visual Poetry》가 시사하는 보다 적극적인 단면이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작품은 따라서 상반된 두 개의 얼굴을 보여준다. 하나는 우리의 근현대 대가들의 전통을 잇는 미적 간주곡으로서의 그것이자 또 달리는 보는 것의 역사를 뒤집는, 그럼으로써 그 너머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실험적 선점이자 이를 앞당기기 위한 도덕적 모험이 아닐까싶다. 작가는 적어도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러기에 권현진은 한편으로는 온건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강인한 유동하는 이미지를 창출해 왔다. 작가는 선대의 그것을 계승하지만 달리는 경직된 조형의 세계를 해체한다. 아니 이를 위해 실재하는 형상의 세계를 전복함은 물론 그 너머를 보고자 색채의 강열한 고채도와 스푸마를 빌린다. 그럼으로써 누구나 즐거워할 색채의 팬태스마를 선사한다.

일찍이 권현진은 이를 멀리는 비잔틴 시대의 추상장식과 고딕시대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았고 가까이는 지금은 잊혀진 한국의 삼국시대를 전후로 강열했던 우리의 유채색 복식문화의 전통에서 21세기의 하이퍼 리얼의 색채회화를 재창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21. 7